2026년 상반기 회고: 번아웃에서

상반기에 뭘 했지? 하고 생각해보면 사실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뭔가 하긴 했는데 회고로 쓸 만한 대단한 일은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상반기 회고를 쓰지 말까 했다.
나 상반기에 뭐 했지? ...출근? ...야근? ...그리고 또 출근?
약간 이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뭔가를 엄청 많이 해냈다기보다는 개발자로 계속 살아가도 되는 건지 고민을 많이 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하다가 아주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일단 번아웃이 왔다
1월과 2월은 개발자에 대한 번아웃이 강하게 왔던 시기였다. 진짜로 일 그만하고싶고, 누워서 쉬고싶다 같은 생각을 꽤 많이 했다.
과거부터 꾸준히 일학습병행을 하고 있었고, 관련해서 상까지 받으니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다’는 부분이 어느 정도 충족됐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이후에 강한 충격과 피로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회사에서는 계속 야근을 했고, 개발자로서 늘 하던 일만 반복하고 있었다. 맨날 비슷한 CRUD를 만들고, 또 만들고, 계속 야근하다 보니까 내가 성장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는 매일 야근하고, 개인 생활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로와 번아웃이 쌓이고 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마주하기보다는 그냥 다른 일들로 외면하려고 했다.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고, 카페도 가고, LP로 음악도 듣고, 그렇게 놀면서 잠깐씩 빠져나오려고 했다. 친구들이랑 놀 때는 분명히 재밌었다. 카페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LP로 노래도 들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다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런 시간들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다만 번아웃이 해결됐다기보다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에 가까웠다.
다시 개발을 바라보기 시작한 계기

그러다 5월쯤 ‘아, 이제는 조금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생각만 하고 바로 정신을 차린 건 아니고, 아무튼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은 했다.
처음으로 GDG 강연을 들으러 갔다. 여기서 제미나이에 대한 이야기와 요즘 개발자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개발 생태계가 훨씬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AI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요즘 개발자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그 고민도 같이 왔다.
개발에서 AI를 어떻게 써야 하지?
AI를 쓰기 시작하면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하지?
이러다 AI가 내 업무까지 다 하는 것 아닌가?
그럼 나는 뭘 하지?
AI야 너 일 다 하면 나는 카페나 차릴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흥미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러면서 루퍼스 클럽이라는 곳에도 가게 됐다. 개발자들끼리 성장하고 네트워킹하는 곳인데, 지인분이 추천해주셔서 참여하게 됐다.
프론트엔드 개발자인 내가 평소에 힘들어하고 고민하던 영역에 대한 발표를 들을 수 있었고, 함께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미션도 하면서 생각보다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냥 좋은 강연과 모임에 참여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뒷풀이에서 나눈 대화가 내게는 큰 전환점이 됐다.
계속 다니고 싶은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
그날 연사자 두 분과 나와 비슷한 연차의 분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의 나는 앞으로 어떻게 개발해 나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었다. 계속 야근하고, 맨날 하던 CRUD만 개발하다 보니 현타가 많이 와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직만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지금의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무한한 굴레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함께 이야기했던 분 중 한 분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계속 다니고 싶은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
처음에는 ‘오… 멋있는 말이다’ 정도로 듣고 있었는데, 집에 와서 계속 생각났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를 딱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지금 내 환경에서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하지 않았지?’
‘왜 그냥 도망치려고만 했을까?’
‘왜 이직만 생각하면서, 내가 있는 곳을 조금이라도 바꿔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동안 이직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회사가 힘드니까 일단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꼭 도망가는 것만 방법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분께서는 사내에서 개발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개발자가 어떤 식으로 일의 흐름을 바라보면 좋은지 이야기해주셨다. 또 다른 분께서는 본인이 다니고 싶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직접 하나씩 시도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 이야기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내게는 정말 좋았다. 앞으로 어떻게 개발해 나갈지 몰라서 힘들어하고 있던 나에게, 그분들이 긍정적인 에너지와 다시 시작해볼 힘을 불어넣어주셨다.
그리고 내가 왜 개발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다시 떠올리게 됐다.
나는 삶이 조금씩 더 나아지고, 내가 개발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편리함과 행복을 느끼는 삶을 꿈꿨기 때문에 개발자가 되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이유는 잊은 채, 버티거나 도망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내가 개발을 하고 싶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번아웃에서 빠져나와 다시 반등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거창하게 인생이 바뀐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방향키를 조금은 다시 잡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바꿔보기로 했다
그날 나왔던 방법 중 하나를 실제로 해보기로 했다. 말로만 ‘환경을 바꿔야지!’ 하는 건 너무 많이 해봤으니까, 이번에는 진짜 작은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매일 야근하는 것이 일상이 된 삶에서, 우선 매주 수요일은 칼퇴근해보기로 했다.
매주 수요일만큼은 제발 정시에 나가자. 수요일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도 하나씩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마침 회사에도 AI를 개발에 활용하는 분들이 있었고, 회사에서 AI 도구 지원도 생겼다. 회사 분들과 지금 각자 활용하고 있는 스킬들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업무에 AI를 어떻게 더 잘 붙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시도해봤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프론트엔드 팀에서 AI 기술을 먼저 찾아보고 공유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AI가 내 일 다 하면 나는 뭐 하지?’라고 걱정하던 사람이, 이제는 ‘AI를 우리 업무에 어떻게 더 잘 붙이지?’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 일은 진짜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내 생각이 이렇게 빨리 바뀔 줄 몰랐다.
예전에는 환경이 바뀌기만을 기다렸고, 힘들면 어떻게든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있는 곳에서 바꿀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바꿔보려고 한다.
아직 이 변화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은 무작정 도망치기보다, 내가 계속 다니고 싶은 환경을 조금씩 만들어가 보고 있다.
그래서 상반기에 뭘 했냐고요?
2026년 상반기는 무언가를 크게 이룬 시기라기보다, 개발자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은 시기였다.
처음에는 상반기에 한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적어보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번아웃도 겪었고, 도망치고 싶어도 해봤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다시 힘도 얻었다.
번아웃이 왔고, 한동안은 그걸 외면했다. 개발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했고, 이직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왜 개발자가 되고 싶었는지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은 작은 것부터 바꿔보는 중이다.
매주 수요일 칼퇴하기,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 하나씩 만들어보기, AI를 업무에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
어쩌면 아직 대단한 성과는 아닐 수도 있다. 매주 수요일 칼퇴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AI를 조금 활용한다고 갑자기 엄청난 개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번 상반기는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아직도 가끔은 아 나 도태됐나?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이제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럼 뭘 해볼 수 있지?’까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